충정공 이홍술(李弘述, 1647년(인조 25)∼1722년(경종 2))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노론 삼장신 중 한명이고, 연잉군(영조대왕)을 왕세제로 세우는데 역할을 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선(士善)이다. 제14대 선조대왕의 사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5대손이며, 왕손 하원군 의헌공 이정의 현손이고, 종실 당은군 이인령의 증손이며, 종실 응천군 이돈(凝川君 李潡)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 이석한(李錫漢)이다.
1674년(현종 15) 무과에 급제, 훈련대장으로 있을 때 청나라에서 심양성(瀋陽城)을 증축하니 우리도 평안도 방면의 군비를 충실히 할 것을 청하였다. 벼슬이 포도대장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이르렀다.
숙종대왕이 숭하하자 김일경(金一鏡) 등이 환관·궁녀들과 결탁하여 조정을 뒤집으려 하였으나, 그의 궁궐 호위(扈衛)가 삼엄하여 간사배들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경종대왕이 즉위하였으나 아들이 없자 김창집(金昌集) 등과 함께 건저(建儲)하기를 거듭 청하여 연잉군(延礽君: 후에 영조)을 왕세제로 삼아 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데 공이 컸다.
1720년(경종 즉위년) 포도대장으로 있으면서 술사(術士) 육현(陸玄)을 태장을 쳐 죽인 일이 있었는데, 육현이 김창집의 음모사실을 알기 때문에 김창집이 그를 시켜 죽이게 하였다고 김일경 등이 조작하여 옥사를 일으켰다.
또한 1722년 다시 목호룡(睦虎龍)이 경종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는 이른바 삼급수(三急手)의 고변에 관련되어 하옥되었다. 김일경이 본래 그를 미워하였으므로 직접 가혹하게 심문하였으나 끝까지 불복하다가 마침내 모진 매로 인하여 죽었다.
죽은 뒤 가산이 적몰되고 가옥은 목호룡에게 상급으로 나갔다. 1741년(영조 17) 관작이 복직되고 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사기막 선영에 모셨다. 청학계곡 옥류동, 사기막은 덕흥대원군 사패지지 였던 걸 동돈녕 이홍일 도정궁 사손이 동생 충정공 이홍술에게 분배한 사패지지이다. 대원군 사패지지는 서울 노원 상계동부터 남양주시 청학리 청학계곡까지 덕흥대원군 사패지지였다. 동생은 사기막, 옥류동 선영을 형이 도정궁 사손 동돈녕 이홍일은 금류동, 은류동을 소유하였던 것이다. 도정궁가 수락산 선영(선산)은 서울 노원구 상계동 동마골 선영, 남양주시 덕릉마을 덕사(흥국사) 도정궁 사손가 선영,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청학계곡 사기막 선영, 남양주시 별내동 수작동 선영이 바로 수락산에 있는 덕흥대원군파 대표 장손가(종실 당은군 계열) 선영들이다.
그리고 청학계곡 마당바위는 충정공 이홍술 대장의 종가에 있던 바위이다.
근대까지 충정공 이홍술 대장 종가는 남아 있었다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울 삼청동 담존재(충정공 손자 담존재 이명익의 호를 따 담존재라 불렸다.) 종가 없어지고, 청학계곡 사기막 종가(별서나 재실로 사용한 건물)도 없어졌다. 근대까지 충정공 이홍술 대장 원수부 국장 이해원 종손은 일제시대 별내면장 재직 시절 남양주시 별내동 삼일운동에 가담하였다고 하여 일제에 의해 심문과 태형에 쳐해져 장 50대를 맞았고, 의친왕 상해 망명 사건인 대동단 사건 때 자금 전달하였다는 정황으로 일제에 의해 또 심문 받았던 애국지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바로 서울 삼청동 담존재 종가를 떠나 남양주시 청학계곡 사기막 종가에서 기거하였다.
덕흥사적연구회장 이학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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