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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이형규(李亨逵)의 부실(副室) 남양홍씨(南陽洪氏): 조선 후기 충절의 상징, 그녀의 삶과 순절

덕흥대원군 가문 이야기

by 학당 2025. 3. 2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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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이형규 간찰, 학서당 소장

 

감사 이형규(李亨逵)의 부실(副室) 남양홍씨(洪氏): 조선 후기 충절의 상징, 그녀의 삶과 순절

남양홍씨( 南陽 洪氏)의 생애와 가계

출생과 가문

남양홍씨(南陽洪氏, ?년~?년)는 조선 후기의 여인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홍처훈(洪處勳, 17511831)**으로 향리(鄕吏)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였다.

동생으로는 조선의 의녀(醫女) **홍윤애(洪允愛)**가 있으며, 홍윤애는 조선 정조(正祖) 시기 제주에서 의녀로 활동하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감사 이형규의 부실로서의 삶

남양홍씨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경기도 감사(監司)를 지낸 이형규(李亨逵, ?~1789)의 부실(副室)**로 들어갔다. 이형규는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선조의 부친)의 8대손으로, 충정공(忠貞公) 이홍술(李弘述)의 증손자이기도 했다.

남양홍씨는 이러한 명문가로 시집갔으나, 남편 이형규가 1789년(정조 13년)에 별세하면서 그녀의 삶도 비극으로 마무리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남편이 별하자 독약을 먹고 순절(殉節)했다고 전해진다.


시대적 배경과 여성의 역할

조선 후기의 유교적 가치관

조선 후기는 성리학적 가치관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 여성의 정절(貞節)과 충절(忠節)이 강조되었다. 특히, 양반가 여성들은 **부덕(婦德), 부순(婦順), 정절(貞節)**을 갖춘 여성상이 요구되었다.

남양홍씨가 남편의 사망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당시 유교 사회에서 '열녀(烈女)'로 평가받는 행위였다. 이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미덕으로 여겨졌으며, 열녀문(烈女門)이 세워지는 등의 방식으로 기려지기도 했다.

동생 홍윤애의 비극과 시대상

홍윤애는 1781년 제주에서 유배된 조정철(趙貞喆)을 돕다가 누명을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는 조선 후기 강력한 정치적 탄압과 의리(義理) 중심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남양홍씨 역시 유교적 가치관 속에서 남편의 죽음을 맞이하고, 이에 대한 충절을 지키려는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묘소 및 후대의 평가

감사 이형규와 남양홍씨의 묘소

남양홍씨의 남편 이형규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수락산 청학동 계곡 마당바위(장암) 사기막(옥류동) 좌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남양홍씨 개인의 묘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후대의 평가

남양홍씨에 대한 별도의 사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그녀의 이름이 기록된 이유는 **순절(殉節)**이라는 극단적인 선택 때문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 여성들이 강요받았던 유교적 가치관과 연결되며, 후대에 충절을 지킨 여성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결론

남양홍씨는 조선 후기의 여성이자, 남양홍씨 가문과 덕흥대원군 가문의 연결고리였다. 그녀의 삶은 철저한 유교적 가치관 속에서 충절과 정절을 지키려 했던 조선 여성들의 삶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동생 홍윤애의 죽음과 함께, 그녀의 비극적인 선택은 조선 후기 여성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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