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대군(永昌大君, 1606년 4월 12일(음력 3월 6일) ~ 1614년 3월 19일(음력 2월 10일))은 조선 중기의 왕자로,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와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의 아들이다. 그의 본명은 이의(李㼁)이며,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다.
영창대군은 선조가 55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유일한 적자였기 때문에 당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지만,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세자 교체를 고민하기도 했다. 이는 정치적 갈등을 야기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년) 12월, 영창대군은 대군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인해 외할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반역죄로 사사되었고, 영창대군 역시 폐서인(廢庶人)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1614년, 대북 세력의 주도하에 강화부사 정항(鄭沆)의 관리 아래 가혹한 대우를 받았고, 결국 9세의 어린 나이에 유배지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상이하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뜨거운 온돌 위에서 증살(蒸殺)되었다고 전해지며, 《인조실록》에서는 독살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영창대군이 살았던 시기는 조선 중기의 혼란기였다. 선조가 승하한 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면서 정치적 갈등이 극심해졌다. 당시 조선 조정은 대북(大北)과 소북(小北), 그리고 서인(西人)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영창대군은 복권되었다. 같은 해 3월 15일 그의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이복 형 경창군(慶昌君)의 넷째 아들 창성군 필(昌城君 佖)이 영창대군의 양자로 입적되어 가계를 이었다.
그의 묘는 경기도 광주군 남한산성 아래(현 성남시 태평3동)에서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로 이장되었다. 1983년, 《영창대군묘》는 경기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두 기록 간 차이가 있어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영창대군은 조선 왕실의 비운의 인물 중 하나로, 정치적 갈등 속에서 희생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의 죽음은 조선 왕조 내 권력 투쟁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역사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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