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실 밀성부정 괴산 종택은 충북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에 위치해 있다. 정확히 언제 창건된 지는 모르지만 밀성부정 제12대 이영주 사손 말에 의하면 조부 되시는 종실 밀성부정 제10대 사손 이헌용 사손 때부터 거주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선원속보(덕흥대원군파보)를 보면 이영주 사손의 5대조 미둔(美遯) 이원식(李元植) 사손부터 이미 괴산군에 묘소를 조성한 것을 알 수 있어 이영주 사손의 고조(高祖)되시는 학고(鶴皐) 이필응(李必應) 사손 때에는 괴산군에 정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종실 밀성부정 종가의 정착 경위를 보면, 밀성부정 이면은 제14대 선조대왕의 사친 덕흥대원군의 증손이며, 선조대왕의 백형인 하원군 이정의 손자이고, 도정궁 사손 당은군 이인령의 2남으로 25세로 별세하였다. 종실 밀성부정은 현 서울 종로구 사직동 도정궁에서 탄생하였다. 길례 후 한성에 거주하였고, 밀성부정의 아들 어모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 이진한 사손도 한성에서 거주하였다. 이진한 사손이 따님(밀양인 박수충(朴守冲)에게 출가, 초정(草亭) 박수현(朴守玄) 선생의 동생임.)만 두고 별세하여 밀성부정의 후사가 없어 동생 종실 밀산군 정혜공 이찬의 손자이며, 증 좌참찬 행 참판 이익한 사손의 2남 통덕랑 이홍규 사손을 양자로 삼아 밀성부정 후사를 잇게 하였다.
밀성부정 제2대 통덕랑 이홍규 사손의 생가는 밀산군 후손으로 밀산군은 도정궁에서 탄생하여 서울 종로구 사직동 소빈 함양이씨 저택에서 거주하였다가 광해군 때 인경궁 공사로 소빈 저택을 헌납하고 북악산 아래에서 거주하였다.
밀산군의 장남 증 좌참찬 이익한 사손은 북악산 백련봉(白蓮峯) 아래 삼청동에 거주하면서 호를 연파(蓮坡), 백련당(白蓮堂)라고 하였다. 아마도 백련당(白蓮堂)은 택호로 보인다. 이홍규 사손이 이 백련당(삼청동)에서 탄생하였다. 밀성부정 후사가 되면서 밀성부정 저택에서 거주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홍규 사손의 호는 이빙재(履氷齋)로 택호로 보인다. 이 이빙재가 밀성부정 저택인지는 알 수는 없다. 그리고 이빙재가 서울에 있었는지 아님 경기도 이천에 있었는지 또는 충북 괴산에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괴산 종택은 영주 사손의 증언에 의하면 조부되시는 밀성부정 제10대 이헌용 사손 때부터라 하니 이헌용 사손은 갑술(甲戌) 1874년(고종 11) 탄생하여 1940년에 별세하였다. 혼례 후 분가하였다고 가정하면 17세~20세 전후 보면 괴산 종택은 지금으로부터 130년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괴산 종택의 대지 규모는 1,498 제곱미터, 즉 약 453.2평 정도가 된다. 토지 대장을 살펴보니 1912년 7월 1일 소유주는 이헌용 사손으로 되어 있고, 사정되었다고 나온다. 1981년 4월 27일 손자인 이영주 사손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2010년 9월 8일 최 모씨 외 1인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까지 최 모씨 외 1인이 소유하고 있다. 이영주 사손께서 괴산 종택을 처분하였다고 한다. 2016년 5월 10일 괴산 종택의 대지는 분필 되었다. 종택 건물은 ㄱ자 본채와 별채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영주 사손에게 종택의 당호가 있는지 물어 보았더니 없다고 한다. 필자가 지명을 따 밀성부정 괴산 종택으로 적어 놓는다.
필자는 밀성부정의 직계는 아니지만 필자의 10대조 성균진사 이홍진의 중형(仲兄) 댁의 종택이 없어져 아쉬움이 클 분이다. 후손들이 종택을 잘 관리하고 후손들에게 잘 물려주면 더 좋을 것이지만 밀성부정 제12대 이영주 사손께서 타지로 나와 학업과 직장 생활하면서 서울에 정착하면서 시골에 있던 괴산 종택의 필요성이 없다 하여 처분하였다고 한다. 현재 영주 사손은 내발산동 있는 아파트에서 거주하고 있다.
덕흥사적연구회장 이학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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