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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종실 장림도정(長臨都正) 이덕령(李德齡, 1575년-1638년) 묘소 이야기

덕흥대원군 가문 이야기

by 학당 2023. 9. 1.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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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정조 24) 3월 22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종실 장림도정(長臨都正) 이덕령(李德齡, 1575년-1638년) 묘소 이야기

 

종실 장림도정 이덕령 묘역 투장 이야기가 일성록에 나와 있어 소개 해본다.

 

“장단(長湍)의 유학 이형심(李亨心, 장림도정 6대 사손)의 상언에 ‘저의 6대조인 장림도정(長臨都正) 이덕령(李德齡)과 5대조인 충양수(忠陽守) 이흥길(李興吉)의 분산이 과천(果川, 상초리 마랑동, 현재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데 여러 대의 조상을 잇대어 장사 지냈습니다.

제가 장단에서 떠돌며 살다가 무자년(1768, 영조44)에 성묘하러 갔더니 5대조 분산의 단청룡(單靑龍) 20보 안에 흙을 돋운 곳이 있었는데 어린아이를 묻고 봉분을 만든 것 같았습니다. 묘지기에게 따져 물었더니, 그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탐문해 보아도 단서를 찾을 수 없었고 돋운 흙이 그대로 평평해져서 깊이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을묘년(1795, 정조19)쯤에 이전에 돋우었다 평평해진 곳에 봉분 모양이 크게 솟아 있기에 묘지기를 불러 물어보았더니, 평구 찰방 한승유(韓昇裕)가 이제야 흙을 돋아 봉분을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한승유의 어미가 죽을 당시 한승유는 포대기에 싸여 있었는데, 아랫것의 상이 났다고 하면서 장례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남모르게 저의 조부의 분산과 지척의 거리에다 그 어미를 몰래 매장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수십 년 동안 상대쪽이 누구인지 몰라서 소송을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제야 사실을 알고 놀랍고 황당함을 이기지 못하여 즉시 과천의 수령에게 정소하였습니다. 적간하고 측량했더니, 이곳은 법리로 볼 때 즉시 파 옮겨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한승유는 조관(朝官)의 신분을 믿고서 관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저의 6대조와 5대조는 숭품(崇品)의 종친이므로 네 산소의 20보 안에는 다른 사람이 가까이에 매장할 수 없습니다.

부디 한가의 무덤을 파 가게 하여 선조의 묘를 보전할 수 있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종신(宗臣)의 분산에서 20보쯤이면 법으로 매장을 금해야 할 곳입니다.

하지만 한승유의 어미를 매장한 지 30년이나 되었는데, 지금에야 쟁변하는 것은 매우 의아한 일입니다.

분명히 조사하여 공정하게 판결해 주라는 뜻으로 도신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윤허하였다.<일성록>

현재 종실 장림도정 묘소는 1969년 4월 5일 후손에 의해 전북 순창군 유등면 화탄리 갑좌(현 전북 순창군 유등면 무수리 산 115-2)로 이장함.

묘역에는 1982년 4월 4일에 세운 신도비와 사당인 영모재가 있고, 후손들이 매년 음 10월 6일에 제사를 지낸다.

 

※유학 이형심(李亨心) 종실 장림도정 6대 사손의 가계

조선국 제11대 중종대왕의 7남 덕흥대원군(제14대 선조대왕의 사친) – 장남 왕손 하원군 이정 – 5남 종실 장림도정 이덕령 – 장남 종실 충양수 이흥길 – 장남 통정대부 이유한(李維漢) - 장남 이시망(李時望) - 장남 이성하(李盛夏) - 장남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이진복(李震馥) - 장남 이형심(李亨心)

덕흥사적연구회장 이학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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