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유옹주 - 창성위 황인점 묘
和柔翁主 - 昌城尉 黃仁點 墓
화유옹주(和柔翁主, 1741년(영조 17)-1777년(정조 1))은 조선 후기의 옹주로 본관은 전주, 영조대왕의 10녀이며, 어머니는 귀인조씨(貴人趙氏)이다.
호조참판(戶曹參判) 황재(黃梓)의 아들인 황인점(黃仁點)에게 1753년(영조 29) 2월 27일에 하가하였다.
1777년(정조 1) 5월 21일에 향년 37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여월동에 있다.
아들은 황기옥(黃基玉)이고, 딸은 참봉 김제만(金濟萬)에게 출가하였다.
창성위 황인점(昌城尉 黃仁點, ?년-1802년(순조 2))은 조선 후기의 부마도위로 본관은 창원(昌原), 휘는 인점(仁點)이다. 이조판서 황흠(黃欽)의 증손이며, 황서하(黃瑞河)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호조참판 황재(黃梓)이며, 어머니는 권욱(權煜)의 딸이다.
1751년(영조 27) 영조대왕의 제10녀 화유옹주(和柔翁主)와 길례하여 창성위(昌城尉)에 책봉되었다.
영조대왕이 승하하자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부터 1793년에 이르기까지 17년 사이에 진하 겸 사은정사(進賀兼謝恩正使) 1회,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 3회, 동지정사 1회, 성절 겸 사은정사(聖節兼謝恩正使) 1회 등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청나라 수도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앞서 1784년(정조 8) 동지 겸 사은정사로 연경에 갔을 때 함께 갔던 이승훈(李承薰)이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천주교관계서적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사로서 이 사실을 몰랐다 하여 책임추궁을 당하기도 하였다.
화유옹주 - 창성위 황인점 묘(和柔翁主 - 昌城尉 黃仁點 墓)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작동에 있다. 1777년 화유옹주가 먼저 별세하고, 1802년 창성위 황인점이 별세하여 합장하였다. 원래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작동 126번지에 있었으며, 곡장(曲墻)을 두른 묘역에 옥개형(屋蓋形) 묘비와 상석(床石)·혼유석(魂遊石)·향로석(香爐石) 등의 석물도 장식되어 있었으나 1992년 도로 건설로 인하여 작동 산28-6번지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이장할 때 출토된 30여 점의 유물은 국립고궁박물관과 부천향토역사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다.